오늘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석굴암에 대해 포스팅하겠습니다. 유홍준 교수는 '무릎팍도사' 예능에 출현할 당시 "우리나라 모든 문화재 중에 석굴암만 있으면 세계 어떤 문화재에도 뒤지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석굴암 부처님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국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굴암 부처님 창건 설화
삼국유사에 보면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건립하였다는 창건 연기 설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경주 모량리에
경조(慶祖)라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해 성과 같았다. 그래서 대성이라고 이름했다. 집이 궁색하여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준 약간의 밭을 일구며 생활했다.
어느 날 점개라는 스님이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를 권했다. 복안이 베 50 필을 시주함에 점개스님이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니, 천신이 항상 수호하소서, 하나의 보시로 만 배를 얻고 안락하게 장수하소서" 하며 축원하였다.
대성이 이를 듣고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스님의 축원하는 것을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지금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가난할 것이니,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보시하여 훗날의 과보를 도모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어머니도 좋다고 하여 그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뒤 대성이 죽었는데 그날 밤 재상 김무량(金無亮)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있어,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지금 너의 집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했다. 집안사람들이 놀라 사람을 시켜 찾아보도록 하였더니,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외침이 있던 때에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니 왼손을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폈다. '대성'이라고 새긴 금패쪽이 있어 또 대성이라고 이름했다.
대성이 장성하자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아래 마을에서 잤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시비를 했다. "네가 어째서 나를 죽였느냐? 내가 도리어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 용서를 빌었다. 귀신이 말했다. "나를 위하여 절을 세울 수 있겠느냐?" 대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꿈을 깼다.
이로부터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해 그 곰을 잡았던 자리에 장수사를 세웠다. 이로 인하여 자비로운 원력이 더욱 깊어 갔다. 그리하여 현세의 양친을 위하여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창건하여 신림, 표훈 두 성사를 청하여 거주케 했다.
이상의 삼국유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옛날 경주 모량리 가난한 집에 '대성'이란 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 가지고 있던 밭을 보시합니다. 죽은 후 재상 김무량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곰 사냥이 인연이 되어 불교에 귀의한 뒤 불심이 깊어져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건합니다. 이것이 삼국유사에 언급된 창건 설화의 역사적인 내용입니다.
석굴암 약사(略史)
신라인들은 다섯 명산을 중시하였습니다. 이 다섯 명산을 오악(五岳)이라고 합니다. 신라인에게 있어 오악은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팔공산'을 말합니다. 석굴암은 이 오악 가운데 서라벌 수도와 가장 가까이 있는 토함산 마루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565m 고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석굴암은 신라 제35대 임금인 경덕왕(景德王) 10년(751년), 불국사를 창건할 당시의 재상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석불사라는 이름으로 창건이 시작되었으며 혜공왕 10년(774년)에 완성되었으며 건립당시에는 석불사(石佛寺)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에 만들어졌습니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성하였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경주가 평범한 지방도시가 되고 숭유억불 정책으로 석굴암은 점점 방치되기에 이릅니다. 특히 조선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하여 깊은 산속에 치안이 불안해서 스님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는 까닭에 비어 있는 절이 많았다고 합니다.
석굴암은 한참 동안 잊혀 있다가 1907년에 우연히 일본인 우편배달부가 석굴암의 존재를 발견하고 일본인에게 알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석굴암은 향을 올리고 공양을 계속 올렸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즉 석굴암을 방치되어 있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토함산에 석불이 발견되었다는 극적인 소문을 퍼뜨려 석굴을 훼손하고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계기를 만들었다는 주장입니다.
1910년 조선통감부에서는 처음에는 석굴암을 해체해서 경성부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해체를 해보니 돌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석굴암을 이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이전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미 조선은 일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 일본 정부의 재산이니 반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은 1913년 10월부터 1923년까지 석굴암을 세 차례 해체한 후 복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석굴암이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불상에 엄청난 결로와 이끼가 출몰하게 되었습니다. 화강암으로 건립된 석굴암 본존불 및 내부에 습기가 출몰하고 이끼가 계속 끼게 되는 큰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본래 석굴암은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건립되어 있어서, 지하수 샘물이 석굴암 바닥에 흐르면서 석굴암 바닥을 냉각하여 일부로 바닥에 결로를 일으켜 습기를 밖으로 배출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즉 천연 샘물의 온도를 이용해서 자연적으로 결로가 생기지 않게 건립되었다는 것입니다.
석굴암이 세워진 바위에서 샘물이 쏟아난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이 물을 이용하여 석굴암을 짓고 결로를 예방하였다는 것은 선조들의 지혜가 정말 대단했음을 의미합니다.
일본은 석굴암을 경성부로 옮기려는 계획으로 석굴암을 해체하였으나 화강암 돌의 무게나 엄청나 도저히 옮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시 복원하는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콘크리트는 방수는 탁월해도 방습에는 취약하기 때문에 석굴암은 콘크리트를 사용함으로써 더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석굴암 내부의 습기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석굴암 내부를 완전히 밀폐하고 그 안에 에어컨을 계속 가동함으로써 습기를 제거하는 방법을 쓰게 되었고 현재까지 이 방법으로 결로를 예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어컨으로 인해 미세한 진동이 있고, 콘크리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와 칼슘은 화강암 벽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콘크리트는 수명은 일반적으로 100년이기 때문에 석굴암은 점점 병들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석굴암 구조와 사상적 배경
일반적인 견해로 설명하자면 석굴암의 구조는 석가모니 붓다가 정각을 이룬 후 21일 동안 7곳에서 화엄경을 설할 때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부다가야 보리수나무 밑에서 정각을 이룬 후, 처음 화엄경을 설합니다. 화엄경은 일곱 곳을 옮겨 가면서 아홉 번의 법회를 통해 설했다고 해서 7처(處) 9회(會) 법문이라고 합니다.
화엄경 세주묘엄품을 보면, 석가모니 붓다는 광명설법을 한다고 나오는데 석굴암의 백호에 있는 유리보석은 화엄경의 광명설법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석굴암 본존불의 백호에는 다이아몬드가 있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현재의 백호는 분실된 까닭에 유리보석으로 대체하여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석굴암의 수인(手印)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고 합니다. 이 항마촉지인은 싯다르타가 정각을 이루기 직전, 마왕인 마라가 "네가 전생에 쌓았다는 공덕이 부처에 이를 만큼인 줄은 어떻게 증명하겠느냐?" 하면서 비꼬았는데, 싯다르타가 "여기 이 땅이 나를 증명할 것이다."라고 하며 오른손을 땅을 짚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석굴암 본존불의 수인은 석가모니 붓다가 마왕을 물리치고 정각을 이룬 때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석굴암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아도 석굴암이 화엄경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엄경을 보면 석가모니 붓다가 정각을 이룬 후 붓다의 광명설법을 듣기 위해 가장 먼저 보현보살과 여러 많은 보살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그다음에 여러 신중들이 운집을 합니다. 그리고 화엄경 입법계품에 보면 선재동자가 53선 지식 가운데 보현보살을 가장 먼저 친견하고, 28번째 선지식으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며, 마지막에 문수보살을 친견합니다.
석굴암 본존불 옆에 보현보살과 여러 보살들이 외호하고 있고, 그 앞에 사대천왕과 팔부신중들이 외호하고 있는 것과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문수보살의 위치를 보면 화엄경 설법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석굴암 본존불 좌우에 붓다의 10대 제자들이 외호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붓다의 10대 제자는 ① 지혜제일 사리불, ② 신통제일 목건련, ③ 두타제일 마하가섭, ④ 해공제일 수보리, ⑤ 설법제일 부루나, ⑥ 논의제일 가전연, ⑦ 천안제일 아나율, ⑧ 지계제일 우바리, ⑨ 밀행제일 라훌라, ⑩ 다문제일 아난존자입니다.
위의 사진은 수미산의 동방을 관장하는 지국천왕, 서방을 관장하는 광목천왕, 남방을 관장하는 증장천왕, 북방을 관장하는 다문천왕입니다. 석굴암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증장천왕, 오른쪽에는 북방 다문천왕과 동방 지국천왕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석굴암의 금강역사는 석굴암 입구에서 팔부신중 앞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금강역사의 자세는 역동적이며 힘이 넘쳐 보입니다. 불교에서 금강역사와 신중의 역할은 불법과 사부대중을 수호하고 보호하는 호법의 역할을 합니다.
붓다는 "인간은 신의 노예가 아니다"라고 하며 신 위에 인간이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불교에서의 신은 불법을 외호하고 호법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다른 종교에서 신을 절대신으로 믿고 의지하는 점과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신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라고 하며, "자등명(自燈明) 자귀의(自歸依) 법등명(法燈明) 법귀의(法歸依)"라고도 합니다.
석굴암 주벽상의 위쪽에는 남북과 동으로 각각 5개의 반구형으로 감실이 있습니다. 석굴과 잘 조화되어 그 아름다움을 더한 이 감실은 동시에 공간의 확대효과를 느끼게 해 줍니다. 본존불의 가장 후방에 있는 십일면관세음보살상만을 피하고 좌우 벽면에 배치되어 석굴암 본존불의 장엄함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석굴암 입장시간과 교통, 가는 길, 주차, 일출 안내
석굴암 문화재 관람료는 새로 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2023년 5월 4일부터 무료입니다. 관람 입장 시간은 주중에는 오전 9시~ 오후 6시까지 이며 주말 및 공휴일에도 오전 9시~오후 6시까지이며 연중무휴입니다. 또한 반려동물은 입장이 불가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승용차를 이용하시는 분은 불국사에서 석굴암 이정표를 따라 20분 정도 토함산을 올라오면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하게 됩니다. 주차장 운영은 경주시 시설관리공단 관광사업팀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요금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승용차(1,000cc 미만) | 중형차(1,000cc 이상) | 대형차(버스) |
1,000원 | 2,000원 | 4,000원 |
대중교통으로 버스를 이용하시는 분은 터미널이나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행 10번, 11번, 700번 버스를 타시고, 신경주역에서는 35분 간격으로 오는 700번을 타고 불국사에 내리십시오. 그리고 불국사에서 석굴암으로 가는 12번 버스로 환승하시면 됩니다. 석굴암에서 불국사로 돌아오는 버스는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고 합니다.
석굴암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지나 석굴암 부처님 불상까지 15분 정도 도보로 걸어가면 됩니다. 석굴암 가는 길은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고 소나무 사이로 동해바다가 보이는 만큼 걷는 길이 정말 훌륭합니다.
석굴암 부처님의 정식명칭은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이라고 합니다. 높이는 약 3.4미터이며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고 아주 정교하게 조각된 세계 석굴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늘게 뜬 눈과 백호를 통해 깨달음의 깊이가 느껴지며, 엷은 미소와 근엄하고 자비로운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고,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습니다.
석굴암을 참배한 후에는 석굴암 주차장 옆에 있는 통일대종을 타종할 수 있으니 타종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또한 아침 일찍 주차장에 오시면 동해에서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석굴암 주차장은 일출명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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